*취미 번역. 정식번역판이 나오면 삭제합니다.

 

 

 

청의 궤적 上

 

쿠노 치아키

 

 


5. 잠깐의 휴식

 

 

“그러니까, 왜 그런 성가신 일이 필요하냐고!”

 

당직 교대 시간 전, 좀 일찍 브릿지로 발을 옮긴 산드라는 브릿지와 통로를 구분 짓는 두꺼운 문이 열린 순간에 귀에 날아 들어온 시원시원한 고함에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같은 소리를 몇 번 하면 알아듣겠습니까? 브릿지 안의 비품을 파손한 경우, 설령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연방에 보고서를 제출하는 게 의무라고 했잖아.”

 

경어와 거친 남자 말투가 뒤섞인 신기한 대답이 어조와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허스키 보이스로 돌아온다. 당연히 산시로와 카이다.

열린 문밖에 선 산드라 쪽에선 메인 스크린 앞에서 그녀에게 옆모습을 향하고 서 있는 카이의 호리호리한 지체밖에 보이지 않는다. 변함없는 바이저 너머의 시선은 산드라에게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는 산시로를 향해있는 듯하다.

 

“지금 현재의 지구 표준시간 따윈 앞으로 몇 년이나 이 배에서 지낼 우리하고는 관계없잖아! 고작해야 시계 하나로 투덜대지 마. 이왕 불평할 거면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떨어지게끔 설치한 정비사 놈한테 하라고!”

 

한 번 흥분하면 단숨에 텐션을 올려버리는 산시로의 엔진을 전개한 고함이 브릿지 가득 울려 퍼진다. 밖에서 듣는 산드라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버릴 정도로 박력이 넘치는 고함을, 말쑥하게 선 카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받아넘기고 있다.

 

“살짝 건드렸다? 선체속도 운동식의 고성능, 쥘 베른의 1/20000 미니어처 모델과 연방의 기장이 달린 값비싼 인테리어를 심심풀이로 다트 표적으로 삼는 인간이 있을 거라고 분별과 양식이 있는 정비담당관이 생각할 리가 없잖아요.”

“난 시계를 표적으로 삼은 게 아니야! 옆에 붙인 성도(星図)를 노렸다고!”

“그럼 실력을 더 갈고닦아야겠군. 과녁을 빗맞힌 건 산시로잖아요.”

“으…….”

 

말이 막힌 산시로의 분한 듯한 신음이 들린다.

마주하는 카이는 거기만 보면 여성적인, 얇고 그림 같은 입술에 도전적인 미소를 띠었다.

얼굴의 대부분을 덮는 바이저가 있음에도 지나칠 정도로 반듯한 용모를 간파할 수 있는 뺨 라인이 미묘하게 변하고, 만들어낸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카이의 얼굴에 인간다운 표정이 떠오른다. 평소에는 바이저에 감춰져 보이지 않는 눈썹이 그 섬세한 포물선에는 어울리지 않는 각도로 치켜 올라가 의기양양한 웃음을 형성하는 데에, 산드라는 저도 모르게 도취해 넋을 잃었다.

 

“또 시작이네.”

 

눈앞의 요란한 소동을 반쯤 어이없이, 반쯤 웃음을 꾹 참으며 듣고 있던 산드라 뒤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말한다.

 

“정말이지, 산시로는 어째서 저렇게 카이한테 덤벼드는 걸까. 카이도 카이야. 조금만 융통성이 있으면 이렇게 난리 나지 않을 텐데.”

 

등 뒤의 목소리에 답한 후 한 걸음 물러나 브릿지로 통하는 문을 닫은 산드라가 뒤에 선 로드를 향해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턱으로 닫힌 문 너머를 가리키며, 아마도 아직 서로 노려보고 있을 두 사람을 상상하고 웃음을 짓는다.

 

“그렇긴 하지만 저래 봬도 사이가 좋다고 해야겠지. 산시로는 누구한테나 저렇지만, 카이가 언성을 높이고 답하는 건 지금까지 본 적이 없으니까.”

“싸울 정도로 사이가 좋다는 뜻인가?”

“그래. 싸울 수 있는 거리까지 산시로가 카이 안에 파고 들어갔다는 말이야. 하긴 산시로한테는 그런 의도가 조금도 없을 것 같지만.”

“확실히 그렇긴 해. 내가 카이를 화나게 하려 해도 그는 조금도 넘어오지 않았지.”

 

쓴웃음이 섞인 로드의 말에 산드라가 휙 돌아보았다.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붉은 속눈썹이 둘린 회색 눈동자가 궁금한 듯이 깜박인다.

 

“어머, 카이를 화나게 해서 대체 어쩔 셈이었을까?”

 

말끔하게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재미있는 듯이 올라간다. 실수했다 싶어 얼굴을 찌푸린 로드는 못 된 장난을 들킨 아이처럼 어깨를 으쓱한 뒤, 눈을 빛내며 그를 보고 있는 산드라를 향해 항복의 증거로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알잖아. 그의 표정이 변하는 걸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는 그……, 어쩐지 모르게 남을 묘한 기분이 들게 하는 분위기가 있어.”

“괴롭혀보고 싶은 타입이란 말이야? 로드한테 그런 취향이 있는 줄 몰랐어.”

 

어느샌가 로드의 굵은 팔은 산드라의 잘록한 허리에 둘리고 산드라는 로드의 두꺼운 가슴에 몸을 맡기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야기의 내용은 카이에게 마음이 없지도 않은 로드의 심리에 대한 것이다. 이런 걸 이른바 어른의 대화라고 하는 걸까.

 

“난 내가 가학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이게 루난의 매력인가.”

“그보다 카이의 매력이겠지. 저 말도 못 붙일 것 같은 차가운 태도랑 최고급품 안드로이드라고 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예쁜 얼굴이 고통이나……, 그렇지, 대놓고 말하자면 쾌감으로 일그러지는 걸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하는 거 아닐까.”

“당신도 제법이네.”

 

아무리 그래도 놀란 로드가 몸을 딱 밀착시킨 아담한 빨간 머리 미녀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당신도 카이한테는 흥미가 있잖아?”

 

산드라의 타는 듯한 빨간 머리에 코를 묻고 쓴웃음과 함께 중얼거린다. 난처한 것 같기도 하고 쑥스러운 것 같기도 한 로드의 얼굴을 여유가 넘치게 올려다본 산드라가 그 물음에 아름다운 미소를 보였다.

 

“나 같은 여자는 자기보다 예쁜 남자를 경원하는 법이야. 글쎄, 카이한테 매력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지만, 굳이 고르자면 산시로한테 입맛이 당겨. 그런 야성적이고 분방한 남자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으니까.”

“맞아. 흔하지 않은 타입이지. 솔직히 고백하면 난 그가 좀 무서워. 그것도 저런 식으로 소리칠 때보다 말이 없을 때가 더.”

“나도 그래.”

“호오, 마음이 맞는걸.”

“당연하지. 버디니까.”

 

카이와 산시로가 들으면 깜짝 놀랄 만한 내용을 정담 삼은 로드와 산드라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산드라가 발돋움하고 로드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조금만 더 가면 입술이 맞닿겠다 싶은 순간, 슉 하는 즉물적인 소리가 나면서 갑자기 브릿지 문이 열렸다.

 

“고치면 되잖아?! 고치면!”

 

어깨너머로 소리치면서 튀어나온 건 산시로다.

 

“고칠 수 있으면 해보도록 해! 정밀회로 한가운데에 나이프를 꽂아놓고! 내가 모처럼 보고서를 쓰는 게 낫다고 충고해줬더니.”

“시끄러워!!”

 

즉각 돌아온 답변에 기세등등하게 말대답한 뒤, 어안이 벙벙한 두 사람 옆을 눈을 부릅뜨고 지나가려던 산시로가 둘을 알아차리고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산드라의 허리에 둘린 로드의 손과 발돋움해서 로드의 목에 두 팔을 감은 산드라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는 요란하게 혀를 찬다.

 

“난 앞으로 일절, 남자하고는 안 짤 거야! 머리 좋은 루난따윈 엿이나 먹으라지!!”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울부짖듯이 그렇게 말하고, 긴 머리가 휘날리는 어깨에서 언짢은 오라를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며 큰 보폭으로 통로 안쪽으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카이가 이긴 모양이군.”

 

산시로의 분연한 태도에 황급히 통로 한편으로 붙어서, 난폭함에도 불구하고 발소리를 내지 않고 멀어져가는 장신을 망연히 바라본 로드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언쟁일 때는 카이가 연전연승이야.”

 

여전히 로드의 팔 안에서 산드라가 답한다.

그러자 한 번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리고 평소와 전혀 변함없는 태도의 카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리호리한 상체를 보는 사람이 숨막힐 정도로 꼿꼿이 세우고, 입은 옷이나 행동거지에는 아주 약간의 흐트러짐도 없다.

 

“실례합니다.”

 

통로에 선 두 사람을 눈치채자 우아한 태도로 가볍게 인사했다. 몸을 밀착시키고 선 채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보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것이었지만, 그걸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다.

카이만 보면 좀전의 대소동이 정말로 있었는지 신기하게 생각될 정도로 차분한 모습이다.

턱을 당기고 똑바로 전방을 향해 지나친 카이의 옆모습은 하도 반듯하다 보니 선뜻 말을 걸기도 망설여지는 분위기가 있었다. 바이저에 감춰져 눈의 표정을 알 수 없는 탓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기 어려운 점이 남을 거절하는 인상을 한층 강하게 한다.

하지만 미끄러지듯이 멀어져가는 독특한 부드러운 걸음걸이, 몸에 딱 맞는 슈트에서 알아챌 수 있는 몸 라인은 그런 카이의 완고한 태도와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카이가 타인이 자기를 어떻게 봐주기 바라는지는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우수한 문관으로서의 능력만, 대놓고 말하면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기계의 일부로 다뤄주기 바라는 것은 타인의 마음에 완전히 어두운 산시로조차 눈치채고 있다.

하지만 바이저로 컬라이더스코프 아이를 숨기고 온몸을 뻣뻣하게 긴장시킨 채 경계하는 카이의 강렬하게 배타적인 태도를 그 나긋한 몸놀림이 배신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는 매력적이야.”

 

카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걸 바라보던 로드가 한숨과 함께 읊조렸다. 산드라의 허리에 두른 손은 정신이 들고 보니 굳게 움켜쥐어져 땀이 흥건히 배었다.

페미니스트를 자인하는 로드로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카이에게는 그의 안에 숨은 가학적인 기분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다.

 

“그치? 그를 보고 있으면 여자인 나도 묘한 기분이 들 때가 있는걸.”

 

로드의 심중을 꿰뚫어본 듯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인 산드라가 이번엔 브릿지 안으로 발을 들였다. 우락부락한 얼굴을 쓴웃음으로 일그러뜨리며 로드가 뒤를 잇는다.

 

“당신한테는 두 손 들었어. 버디인 내가 카이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걸 재미있어하니까.”

 

로드에게 등을 향하고 산시로가 지금까지 앉아 있던 부서에 앉은 산드라가 그의 말에 돌아보며 장난스럽게 눈썹을 올렸다.

 

“어머, 그건 서로 마찬가지잖아. 내가 산시로한테 대시한다 해도, 로드는 재미있어하면 했지 질투는 느끼지 않을 거면서.”

“그건 맞아.”

 

산드라의 산뜻한 반격에 빵 터진 로드가 쓴웃음을 한층 깊게 띤다.

버디에는 여러 타입이 있는데, 한 번 짝이 되면 어느 쪽에 지장이 올 때까지 2인 1조로 행동하는 타입과 그들처럼 임무마다 새로운 상대와 짝을 짓는 타입이 있다. 어느 쪽이 더 유효한지는 아직 전문가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지만, 산드라처럼 장래 지휘관이 되기 위한 발판으로 딥 스페이스 비행을 하는 무관 중에는 임무마다 새로운 상대와 짝이 되는 시스템을 고르는 인간이 많았다.

이건 원래 대학의 연구원이고 오랫동안 우주선의 문관으로 지낼 생각이 없는 로드에게도 마침 좋은 조합이었다.

시원스레 긍정한 로드에게 생긋 웃음을 보낸 뒤 산드라는 표정을 다잡는다.

 

“우리는 농담으로 끝나지만, 카이한테 이건 심각한 문제야.”

“어떤 의미지?”

 

카이가 앉아있던 부서에 큰 몸을 앉히고 바쁘게 표시를 점검하던 로드가 산드라의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 로드 쪽을 보지 않고 방금 카이 일행이 나간 문에 회색 눈동자를 멈춘 산드라가 작게 한숨을 쉰 뒤 말하기 시작한다.

 

“난 정신과 의사는 아니야. 하지만 함선 지휘관 후보로서 승무원의 심리를 분석하는 교육을 받았어. 그래서 아는 건데, 카이의 태도는 양날의 검이야.”

“양날의 검? 확실히 타인과 잘 지낼 타입은 아니지만,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으면 그럭저럭 교류할 수 있지 않을까.”

 

불온한 소릴 꺼낸 산드라에 로드가 눈살을 찌푸린다. 그런 로드의 말에도 굳은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은 산드라는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완강하게 타인과의 심리적 접촉을 거부함으로써 자기를 지키려 해도 한계가 있어. 어떤 종류의 인간은 반대로 그런 태도에 끌려버리기도 해.”

 

닫힌 문을 보는 산드라의 표정은 우수한 지휘관 후보의 엄격한 것이다. 평소에는 나른하게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냉정한 음성으로 카이에게 있어서는 잔혹한 분석을 담담히 이어간다.

 

“카이에게는 깨끗한 걸 더럽히고 싶다, 엉망진창으로 부숴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일으키게 하는 위태로움이 있어. 로드는 정교한 유리 세공품을 손에 들었을 때, 넋을 잃고 보는 동시에 힘껏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어?”

 

긍정 대신 로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나한테 사디스트의 요소가 있다는 걸까.”

“사디스틱한 부분은 누구나 있어. 다만 카이의 용모와 성격의 불균형이 누구나 가진 그런 마이너스 요소를 자극하는 거야. 그런 식으로 카이의 마음이 아니라 그의 표면적인 부분――몸의 반응이나 표정 말이지――만을 강렬하게 원하는 인간이 나타나게 돼.”

 

말을 끊은 산드라가 말끔하게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깨문다.

 

“이건 카이에게도 그를 보는 인간에게도 위험한 일이야. 카이는 그런 섹스를 즐길 수 있는 타입이 아니고, 그걸 허락할 정도의 심리적 여유도 없어.

그렇긴 커녕, 자기가 받은 굴욕을 씻기 위해 상대를 더 잔혹하고 효과적으로 상처입힐 방법을 생각할 우수한 두뇌도 있고, 눈도 깜짝 안 하고 그걸 해치울 만한 강한 의지도 가졌어.”

“―….”

 

로드가 말없이 생각에 빠진다. 산드라의 분석은 적확해서 카이의 성격과 그를 보는 주변 인간의 심리를 알아맞히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로드는 자신의 마음속에 산드라가 말하는 충동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루난=쾌락주의자라는 소문은 카이라는 예외가 가까이 있음으로써 믿을 게 못 된다는 걸 알았지만, 다른 어떤 인종이랑 비교해 봐도 그가 너무 스토익 한 건 틀림없어. 병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야.”

“그는 자신의 쾌락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그런 시선을 향하는 인간도 용서할 수 없다는 뜻인가…….”

 

불편한 얼굴로 읊조린 로드에 마찬가지로 매서운 표정의 산드라가 고개를 끄덕인다.

 

“카이가 앞으로 어떤 임무를 맡든 가는 곳곳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건 불 보듯 뻔해. 설령 그걸 카이가 바라지 않더라도 말이지.”

“그게 카이를 경력에 어울리지 않는 이번 임무로 내몬 이유일지도 모르겠군. 딥 스페이스 비행은 소인수라서 타인의 눈에 띌 기회도 적으니까.”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만약 내가 지휘관이라면, 아무리 우수해도 카이를 부하로 삼고 싶진 않아. 잔혹한 것 같지만, 연방에도 그렇게 보고할 생각이야.”

“그건―….”

 

산드라의 말에 좀 전까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로드가 고개를 들었다.

 

“난 아직 결론을 내기에는 너무 이른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카이에 대한 산시로의 태도는 내가 그를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잖아.”

“그게 뭐?”

 

무슨 소리를 하고 싶으냐는 얼굴로 산드라가 재촉한다. 로드는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듯 말을 골라가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신 얘기를 들으면서 생각했어. 그들은 실수라고 하고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산시로와 카이 버디는 역시 베스트 매치일지도 모른다고.”

“플러스랑 마이너스는 서로 끌어당긴다고 하고 싶은 거야?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만, 인간의 마음은 자석이 아니야. 성격이 안 맞아서야 그리 쉽게 서로 끌리진 않을 것 같은데…….”

 

지극히 당연한 산드라의 말에 로드가 쓴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젓는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좀 더 단순해. 엘리트 군인으로서 엄격한 계급사회를 이겨 온 당신이나, 나나 카이 같이 대학 연구원처럼 머리가 앞서는 집단 내에서는 『성격이 안 맞는』 것 때문에 일일이 적의를 드러내고 진심으로 화내는 인간은 없다는 뜻이지.”

“산시로 얘기야? 확실히 그의 거친 성격에는 애먹고 있지만, 그거랑 이게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야?”

 

산드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한다.

 

“당신이나 나, 그리고 카이도 그렇지만, 자신의 지성에 프라이드를 가진 인간은 감정을 드러내는 걸 무의식중에 자제하잖아? 감정 그대로 언성을 높이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는 교육을 받아왔고, 자기 입장이나 이후를 생각하면 적어도 앞에서 대놓고 소리치거나 언쟁하진 않아. 까딱하면 모처럼 쌓은 인간관계를 망가뜨리게 돼버리니까. 그런데 산시로는――”

“인간관계나 자기 입장 따윈 요만큼도 생각하지 않지. 그때그때의 감정에 목숨을 걸었다는 느낌이니까.”

 

로드의 말을 산드라가 이어받는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로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는지 미심쩍은 듯이 로드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다.

 

“그래. 그는 자기 마음에 정직하고 그걸 드러내는 법도 솔직해. 우리가 자연히 몸에 익힌, 생각하는 걸 능숙하게 감춰버리는, 타인과 교류하기 위한 테크닉 같은 게 전혀 없어.

아마 카이는 걸핏하면 덤벼들면서 잠시 후면 그런 일은 말끔히 잊고 웃어 보이는 산시로한테 분명히 당황했을 거야.”

“저기 로드, 난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정말로 모르겠어.”

 

끈기 있게 그의 이야기를 듣던 산드라의 목소리에 약간 초조함이 섞이기 시작했다. 로드의 말은 하나하나 틀림없었지만, 그게 카이의 우주선 크루로서의 부적격과 어떻게 관계된 걸까.

그런 산드라의 답답함을 읽어낸 로드는 설명을 마무리하고 본제로 들어갔다.

 

“요컨대, 카이는 상대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는 엠파스라는 말이야. 그는 우리가 잘 감췄다고 생각한, 입에 담은 말과는 다른 본심 부분을 느끼는 게 아닐까 싶어. 그게 카이를 저런 식으로 경계시키고 상대의 반발이나 정욕을 부추길 정도로 완고하고 서먹한 태도로 드러나는 게 아닐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아. 말과 본심에 표리가 전혀 없는 산시로의 저 성격은 카이가 경계심을 품게 하지 않는다는 거네. 생각한 걸 그대로 입에 담는 만큼, 묘한 굴절이 없으니까 음습하게 일그러진 부분이 없어. 그런 뜻이지?”

“그래. 그의 감정은 건강하고 강인하고 대단히 알기 쉬워. 대놓고 말해버리자면, 단순해. 게다가 그에게 있어 카이는――”

“『루난 따위 엿이나 먹어』?”

 

얼굴을 마주 보고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카이에게 자신이 루난이라는 걸 의식시키지 않는 인간은 아마 산시로밖에 없지 않을까. 적어도 난 그런 요란한 말다툼은 못 할 것 같아.”

“나도 그래. 산시로랑 다툴 때의 카이는 확실히 굉장히 인간다워. 서로 전면적으로 신뢰하는 상태라고는 도저히 말 못 하겠고 카이의 갑옷은 아직 두꺼운 것 같지만, 우리 둘을 대하는 태도와는 다른 게 확실해.”

“카이는 전에 나한테 사이코세라피스트의 재능이 없다고 했지만, 카이랑 짝이 될 수 있는 인간은 산시로 같은 타입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추론에는 상당히 자신이 있어. 조금 역설적이지만, 카이에게 호의를 얻고 싶으면 카이에게 흥미가 없어야만 해. 그 점에서 산시로는 카이보다도 당신한테 흥미가 있는 것 같으니 합격이야.”

 

밝은 웃음소리를 내던 산드라가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긍정한다.

 

“로드 말이 옳을지도 몰라. 확실히 카이 혼자를 볼 게 아니라 산시로를 포함해서 생각하면 카이의 위태로움은 상당히 상쇄돼. 그러면 그들은 버디 시스템의 좋은 사례일지도 모르겠다는 거지?”

“믿기지 않지만, 그런 뜻이 되려나. 산시로가 곁에 있는 한 카이에게 엉뚱한 짓을 하려고 꾀하는 인간도 적을 테고. 그런 훌륭한 파수견은 별로 없지 않을까. 하긴 그들에게 이런 소릴 하면 말도 안 된다고 혼날 것 같지만.”

“카이랑 산시로……라. 로드한테는 깜박하고 말 안 했는데, 그 두 사람의 작업효율은 대단해. 그만큼 난리 치면서 실수가 거의 없다니 좀처럼 믿기지 않을 정도야.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난 로드만큼 그들의 관계가 플러스라고 생각되지 않지만, 좀 더 관찰해보는 것도 괜찮겠지.”

“나도 100% 안심한 건 아니야. 두 사람 다 과격한 성격이고 카이나 산시로나 아직 수수께끼인 부분이 많으니까.”

 

그렇게 말한 로드는 시선을 들고 아까 산시로와 카이가 난리 친 원인이 된 시계가 걸려 있던 벽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에 걸려 있던 인테리어를 겸한 정교한 시계는 지금은 없고, 시계 모양으로 색이 바랜 벽면이 그들의 긴 항해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 빛바랜 벽 한가운데서 길게 패인 새로운 상흔을 발견한 로드는 무의식중에 혀를 내둘러버린다. 상당한 두께의 시계를 관통해 벽에 이만큼 흠을 남겼다면, 어느 정도의 피해일지 안 봐도 뻔하다. 그 시계가 이제 두 번 다시 이 벽에 걸릴 수 없으리라 생각하면, 그 아름다운 컬라이더스코프 아이를 부릅뜨고 화내는 카이의 모습이 쉽게 상상되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유일하게 카이의 매력에 넘어가지 않는 인간이 연방의 대 컴퓨터가 심신 모두 상성 최고라고 보증한 산시로라는 게 재미있군. 아마도 그는 카이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지 않을까.”

 

로드에게 이끌려 고개를 들고 벽의 흠을 보며 미소를 띤 산드라가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왠지 나, 지금까지보다 더 산시로한테 흥미가 솟아.”

“난 카이가 왜 그렇게까지 완고한지 마음에 걸려. 그런, 루난의 기질을 완전히 부정하는 듯이 살아가는 걸 봐선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고.”

 

얘기하면서 시선을 콘솔로 떨군다. 슬슬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임무로 돌아가지 않으면 배의 항행에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카이에 의해, 다시 체크하는 게 헛수고로 생각될 정도로 정확히 계산되어 이상적인 코스에 오른 진로를 확인하면서 로드는 시선을 기울였다.

자기가 한 말을 머릿속에서 반추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다만, 그걸 캐물을 수 있는 건 아마 산시로뿐일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로드, 산시로를 너무 과대평가하지 마. 그는 파수견이 아니라 늑대야. 상황에 따라서는 카이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되기도 할 거야. 물론 우리에게 있어서도.”

 

로드와 마찬가지로 자기 콘솔에 시선을 쏟으며, 이쪽은 매뉴얼을 무시한 산시로에 의해 사용 방법에 없는 조작을 당해서 비명처럼 경고 램프를 깜박이는 컴퓨터에 악전고투하던 산드라가 답한다 (내심 불평하면서도, 언뜻 보기에 엉망진창인 것 같은데 산출된 답은 그녀가 정당한 방법으로 계산한 것과 완전히 똑같아서 산드라는 항상 놀라게 되었다).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난 그들을 버디로 묶은 컴퓨터를 믿고 싶어.”

 

본인이 침착한 이론파이자 산시로의 격정을 아직 이해할 수 없는 로드는 산드라보다도 상당히 낙관적인 듯하다.

 

“그들이 좀 더 친해질 때까지 심각한 충돌이 없기를 빌어야겠어.”

 

겨우 체크를 끝내고, 이번엔 자기한테 맞춰 멋대로 보관장소를 바꿔버린 비품을 솜씨 좋게 원래대로 되돌리며 산드라가 말한다.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대화를 멈추고 자기 일에 몰두해 갔다. 조용해진 브릿지에 규칙적인 기계음만이 울리고, 전방을 비춰내도록 세팅된 스크린을 멀리서 반짝이는 별이 장식하고 있다.

목적지는 아득한 저편이고, 그들의 임무는 이제 시작이었다.

 

 

“역시 여기 있었습니까.”

 

희미한 비상등 불빛 아래 낯익은 실루엣이 있는 걸 확인한 카이는 사용되지 않는 레크리에이션 덱으로 발을 들였다.

 

“뭔데, 아직 할 말 더 있어?”

 

포장된 기계류를 빽빽하게 쌓아 올린 짐 너머에서 아직도 언짢음이 밴 목소리가 돌아온다. 쥘 베른의 측면 덱은 바깥 경치를 볼 수 있도록 벽 전면이 투과성 초 강화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다. 여기는 산시로가 좋아하는 곳이다.

 

“뭐야, 아직도 삐쳤나 보네.”

 

불쾌해하는 산시로에 새삼 쫄 카이가 아니다. 그를 거북해하는 로드라면 웬만해서는 무서워서 할 수 없을 소리를 쉽사리 입 밖에 내고, 창에 제일 가까운 곳에 놓인 기계 위에 기다랗게 드러누운 산시로 쪽으로 다가간다.

 

“어린애도 아닌데 이제 슬슬 기분을 푸는 게 어떻습니까?”

 

산시로에게만 쓰이는 난폭한 어조와 딱딱한 경어가 뒤섞인 희한한 말이 어둑한 곳에 울린다. 제 것인 양 장소를 점령하고 있는 기계류 사이를 카이 특유의 미끄러지는 듯한 걸음걸이로 나아가 산시로가 드러누운 기계 옆에 섰다.

 

“시계 때문이 아니라, 좀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찾으러―….”

 

카이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고 입속으로 사라졌다. 두 손을 머리 뒤로 돌리고 긴 다리를 아무렇게나 꼰 산시로의 몸 옆에 문제의 그 시계가 뒹굴고 있어서이다.

별 뜻 없이 흘긋 본 뒤 올리려던 시선을 되돌리고 응시한다. 몸을 숙이고 말없이 시계를 보던 카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움직여…….”

 

부드러운 허스키 보이스에 놀람과 칭찬이 뒤섞인다.

 

“당연하지, 고쳤으니까.”

 

드러누운 채 밖을 바라보던 산시로는 카이 쪽을 보려고도 하지 않고 중얼댄다.

시계를 손에 들고 찬찬히 살피는 카이에게는 그 말이 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인테리어를 겸한 쥘 베른의 정교한 미니어처가 달린 시계는 겉 커버가 벗겨져 안의 기계가 노출되어 있다. 그 거의 한가운데에 중추 부분을 완전히 관통한 긴 균열이 있었는데.

나이프라기보다 산도나 만도라고 하는 편이 좋을 듯한 두껍고 긴 날을 가진, 산시로가 애용하는 나이프에 의해 거의 완전히 파괴된 줄 알았던 시계가 카이의 수중에서 확실히 시간을 새기고 있었다. 산시로는 여기서 작업했는지 그의 발치에는 여러 공구가 흩어져 있다.

중추부분을 고쳤을 즈음 질려버렸는지, 그의 머리 위에는 무참한 상처를 드러낸 겉 커버가 뒹굴고 있었다.

 

“공구가 모자랐거든. 이따가 기관실에 가서 물색하고 올게.”

 

카이가 망가진 겉 커버를 보고 있는 것을 느끼고 산시로가 설명한다. 하지만 카이에게 겉 커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틀림없이 수리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시계가 움직이고 있는 편이 훨씬 중요했다.

긴 바늘과 짧은 바늘로 시간을 가리키는 앤티크 기조의 외견이지만, 내용물은 수많은 기능을 가진 고성능정밀기계이다. 나사나 용수철을 바꿔 넣으면 움직이는 간단한 게 아니다. 정밀기계의 약점으로, 한 번 망가지면 전문가가 전문적인 기계를 써서 수리할 수밖에 없고, 그것도 바늘 끝 정도의 섬세한 부품을 신경을 소모하며 채워 넣어 가느니 내용물을 전부 갈아버리는 편이 빠르고 비용도 싼 것이 이런 기계의 상식이다.

그런데 동작도 어조도 거칠고 난폭한 이 남자가 전문적인 도구도 없이 해치웠다는 건, 실제로 움직이는 시계를 손에 들고 있어도 당장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진짜 고칠 줄은 몰랐어…….”

 

긴 침묵 이후 한숨과 함께 뱉어낸 말에 산시로가 간신히 카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안이 벙벙한 카이의 모습에 장난스럽게 눈썹을 치켜올린다.

 

“이렇게 되면 나도 오기가 생겨서. 내 자존심을 걸고 무슨 일이 있어도 고쳐야겠다 싶었어.”

 

오기나 자존심으로 그리 쉽게 고칠 수 있게끔 망가진 게 아니었을 텐데, 여기서 그를 칭찬하는 것도 아니꼬워서 카이는 가능한 한 무뚝뚝하게 시계를 산시로 옆에 놓았다. 옆에 끼고 있던 바인더를 바꿔 쥐고 산시로를 찾았던 본제에 들어간다.

 

“묻고 싶은 게 있어. 아까 당직 중에 통상업무 이외의 성계로 서치를 걸었습니까?”

 

냉큼 시계의 화제를 마무리해버린 카이에 약간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던 산시로는 카이의 이 물음에 눈썹을 올리고 크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진로설정을 위한 기본 서치밖에 안 했어. 그게 왜?”

“컴퓨터의 지시 메시지를 확인했더니 내가 기억 못 하는 서치가 있기에 좀 마음에 걸려서.”

“컴퓨터가 자동으로 하는 학술조사용 정기 서치 아니야?”

“나도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다 쳐도 출력이 너무 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서치가 향한 방향도 신경 쓰이고…….”

 

바인더에 기입된 숫자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는 카이에 산시로도 드디어 진지하게 들을 마음이 생긴 듯하다. 반신을 일으킨 뒤 내던지고 있던 다리를 끌어당긴다.

 

“방향? 좀 보여줘.”

 

카이가 들고 있던 바인더를 받아들고 기재된 숫자에 따라 좌표를 확인한 뒤 미간을 찡그리고 읊조렸다.

 

“이건 미답사 성계네. 블랙홀이 우글우글한 곳이라 위험해서 접근할 수 없는 곳이잖아. 전파도 전자파도 쓸 수 없으니까 제대로 된 성도도 없는 공백 지역이야.”

“맞아. 흔히 말하는 『우주의 버뮤다』 말이죠.”

 

바인더를 카이에게 돌려주며 그의 바이저를 들여다본다.

 

“그게 왜? 뭐가 마음에 걸려?”

“배의 궤도 오차 말입니다. 궤도가 어긋난 시점에 수동으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직진했을 경우 똑바로 이 공역으로 돌입하게 돼 있었거든.”

 

카이를 올려다보던 산시로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떡 벌렸다.

 

“아직도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어?! 질릴 정도로 집념이 강하네.”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 하지만 이로써 수상한 일이 늘어난 건 사실이잖아요?”

 

거기에는 답하지 않고, 산시로가 눈살을 찌푸린 채 생각에 빠진다.

 

“확실히 이 출력의 서치는 학술용으로 치면 너무 강해. 거의 레벨을 꽉 채워서 광범위하게 탐사 망을 넓히고 있어. 우리 당직 시간이니까 산드라나 로드가 한 것도 아닌 것 같고, 실수로 버튼을 누른 것치고는 조작이 좀 복잡해. 난 임무 지시서를 안 읽었지만, 때때로 이런 짓을 한다고 쓰여 있진 않았어?”

 

임무가 결정된 시점에서 의무적으로 반드시 읽게 되어 있는 두꺼운 지시서를 읽지 않았다고 뻔뻔하게 말한 산시로는 카이를 올려다보았다.

불평하고 싶은 듯 입술을 꾹 다문 카이지만, 새삼 산시로에게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아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항목은 없었어.”

 

불평을 삼킨 카이가 산뜻하게 단언한다.

중요한 지시서에 눈길도 안 준 산시로도 대단하지만, 구석구석 살피고 세부까지 기억하고 있는 카이의 기억력도 보통이 아니다. 그리고 매뉴얼을 지키는 데에 정열을 불태우는 카이의 성실한 성격을 지겹도록 잘 아는 산시로는 카이가 단언하면 그걸 의심하지 않는다.

 

“그럼 확실히 신경 쓰이긴 하네……. 좋아, 다음 당직 때 서치 내용이랑 컴퓨터의 지시가 어떤 지령에 의한 건지, 누구의 명령인지 떠보기로 해.”

“그건 이미 조회했어. 컴퓨터의 회답은 『정시확인』, 서치 내용은 『기본항목』이야.”

 

카이의 답에 이번엔 산시로가 고개를 젓는다.

 

“『묻는』 게 아니라 『떠보는』 거야. 메인컴퓨터의 뚜껑을 좀 열어봐야 하긴 하지만, 내려진 지시를 역추적해서 본체를 밝혀내 주지.”

 

얼굴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산시로는 아주 간단히 답했다. 하지만 그 말에 카이는 저도 모르게 몸을 내민다.

 

“그런 게 가능해?!”

“쉽진 않지만 못할 건 없어.”

 

산시로의 대답은 지극히 가볍다. 조작수순의 어디를 봐도 그런 방법은 쓰여 있지 않고, 컴퓨터의 구조상 그럴 수 없다고 배운 카이에게 산시로의 말은 경이로웠다.

일에 관해서만은 산시로의 말을 전면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걸 잘 아는 카이로서도 당장에는 믿을 수 없다.

 

“정말로, 그런 게……?”

 

망연히 중얼거리며 산시로를 보던 카이의 시선 끝에서 산시로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이로써 일단 얘기는 끝났다고 생각한 건지, 기지개를 켠 자세 그대로 털썩 몸을 눕혀 다시 기계 위에 드러누워 버린다. 묶었던 가죽끈이 거의 풀린 장발이 시원한 소리를 내면서 포장 위로 펼쳐졌다.

그의 머리카락은 도저히 손질하는 것 같지 않고 실제로 전혀 돌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기만 보면 어떤 미녀에도 지지 않을 정도의 윤기를 가졌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안광이 날카로운 동양적인 풍모에는 잘 어울렸다. 그렇긴 해도, 그 곱슬기 없는 칠흑의 광택은 거친 성격, 조잡한 말투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지만.

 

“왜 사관으로서의 교육을 받지 않았지?”

 

장신을 마음껏 뻗고 기분 좋은 듯이 눈을 감은 채 느긋하게 쉬는 산시로를 내려다보며 카이가 내심의 의문을 입에 담았다.

 

“네 그 지식과 기량이라면 노력하기에 따라서는 기함 급의 함장이라도 꿈이 아닐 텐데.”

 

이건 산시로와 함께 일하기 시작한 뒤로 줄곧 이상하게 여겼던 일이다. 성격과 언동에 상당히 문제가 있긴 하지만, 산시로의 무관으로서의 실력은 탁월했다.

여기에 사관으로서의 교육을 받고 예절 바른 태도를 몸에 익힌 뒤 기술자로서 정당한 수순을 배워서 중간식을 날려버린 채 정답만 잡아 뽑는 듯한 방식을 고치면 연방의 어떤 배에서도 잘해나갈 수 있으리라고 카이는 보고 있었다.

 

“사관으로서의 교육?”

 

눈을 감고 낮잠 태세에 들어갔던 산시로가 그 말에 어렴풋이 눈을 뜬다.

 

“이 내가? 농담이겠지.”

“저는 농담할 생각이 없습니다만.”

 

전혀 상대하려 하지 않는 산시로에 내심 고개를 갸웃한다. 산시로는 스스로 자신을 과소평가할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타인의 지시를 무시하더라도 자기 생각을 관철하려 할 타입이다. 자신의 말을 자신만만하게 긍정할 줄 알았던 카이는 단박에 부정한 산시로에 약간 맥이 빠졌다.

그런 카이의 마음을 읽었는지, 산시로는 그를 올려다본 뒤 쓴웃음으로 입술을 끌어올린다.

 

“내 성격을 생각해. 얌전히 책상에 앉아서 공부할 수 있을 위인이야? 당신이 좋아하는 매뉴얼을 덮어놓고 들이대면, 네 그렇습니까 하고 수긍하겠느냐고. 끽해야 상관을 때려서 소행불량으로 쫓겨나는 게 고작이겠지.”

“과연, 용병으로 두기엔 아깝다고 생각했는데, 그 성격은 바로잡힐 것 같지도 않아.”

 

칭찬하는 건지 욕하는 건지 잘 모를 카이의 말에 산시로가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인다.

 

“난 이 성격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왜 바로잡아야 하느냐고. 게다가 난 용병이라는 직업이 마음에 들어.”

“위험하고 불안정한 직종이잖아요?”

“그만큼 돈이 되고, 무엇보다 자유로워. 애초에 정의나 의무 같은 훌륭한 간판은 성격에 안 맞거든. 어째 그런 건 생각만 해도 등이 근질거려.”

 

정말이지 그다운 말을 뱉은 산시로는 좀 전부터 같은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카이를 향해 자기 옆을 턱으로 가리켰다.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이제 슬슬 앉아. 그렇게 뻣뻣한 모습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걸 보니 나까지 어깨가 뭉쳐.”

 

드러누운 산시로가 어깨 근처를 가리키자, 아주 약간 주저한 카이는 흐르는 듯한 몸짓으로 산시로 바로 옆에 앉았다.

 

“돈, 말이지. 그렇게 돈이 소중합니까?”

“흥, 돈이 궁한 적 없는 놈이나 하는 소리네. 역시 고생을 모르는 도련님은 말하는 게 달라.”

 

카이와 산시로의 거리는 산드라나 로드가 보면 깜짝 놀랄 만큼 가깝다. 업무에서는 물론 사생활에서도 신경질적으로 타인과의 거리를 유지하려 하는 카이가 이 거리에서 대화하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지만, 당사자인 산시로는 그런 걸 전혀 개의치 않는다. 아마 알아채지도 못했으리라.

 

“난 딱히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야.”

“그러고 보니 이 배에 탄 이유가 양부의 권유라고 했지. 그 나이에 양부 말을 따라서 낯선 우주 구석까지 오려고 하다니, 교육을 잘 받은 인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 혹시 당신 파더 콤플렉스?”

 

방약무인한 산시로의 말투에 카이의 눈썹이 험악한 형태로 올라가고 입술이 꾹 다물어진다. 그런 카이의 표정 변화를 올려다본 산시로는 재미있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교육을 잘 받은 것치고는 성질이 급하고 하는 짓이 꽤 과격하지. 하지만 난 당신의 그런 점을 비교적 좋아해.”

 

산시로의 생각지도 못한 반격에 맥이 빠져서 카이는 화낼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산시로를 향해 뻗으려던 손이 닿기 직전에 바닥으로 떨어진다.

 

“로드가 당신더러 수수께끼 같다든지 너무 냉정 침착하다고 했지만, 당신은 비교적 알기 쉬운 성격을 가진 것 같아.”

 

천진하게 이어진 말에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어버린다.

 

“절 그런 식으로 말한 건 산시로가 처음입니다.”

 

거기에는 답하지 않고, 산시로는 카이를 향해 훌쩍 팔을 뻗었다. 그의 의도를 깨달은 카이가 고개를 슥 뺀다.

 

“뭐야, 어때서 그래.”

 

산시로는 바이저를 벗기려는 것이다. 둘이서 업무를 시작한 지 꽤 지났는데도, 산시로는 카이의 바이저 모습을 인정할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는 듯, 틈만 있으면 그걸 벗기려고 손을 뻗었다.

처음엔 그의 손이 다가올 때마다 경계했던 카이도 그에게 그 이외의 의도가 전혀 없다는 걸 안 뒤로 그다지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요즘은 상당히 익숙해져 버려서, 지금도 산시로의 손가락에서 요령 좋게 얼굴을 피하면서도 일어나려고 하지는 않는다.

앉은 채 반신만 움직이는 카이와 드러누워서 팔을 뻗는 산시로. 서로 장난치는 듯한 움직임이 몇 번 반복된 뒤, 발끈한 산시로가 몸을 일으켜 카이의 몸을 부둥켜안다시피 하고 결국 바이저를 빼앗아버렸다.

 

“해냈다.”

 

의기양양하게 손 끝에 건 바이저를 빙글 돌리고, 그걸 자기가 쓴 뒤 다시 위를 보고 드러누워버린다. 한편 산시로의 두 팔이 몸에 둘린 순간에 몸을 굳히긴 했지만, 그다지 진심으로 도망친 건 아닌 카이는 여전히 기다랗게 몸을 뻗은 산시로 바로 옆에 앉은 채이다.

산시로의 장난을 받아줬다는 듯한 태도로 어쩔 수 없다며 어깨를 으쓱하긴 해도 전처럼 진지하게 되찾으려는 마음은 없어졌다. 카이는 산시로에게 자기 눈을 보여주는 걸 별반 신경 쓰지 않게 되어 가고 있었다.

 

“이런 건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당신도 참 고집 세네.”

“그건 제가 할 소리 같습니다만.”

 

바이저 너머로 느끼는 산시로의 시선은 카이에게 그다지 스트레스가 되지 않는다.

그가 만난 인간 중에 이 눈에 특별한 흥미를 품지 않은 자는 없다. 그건 산시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흥미진진하게 컬라이더스코프 아이를 들여다보는 그의 눈은, 방금 산 만화경을 넋 놓고 보는 아이의 시선 그 자체였다. 산시로는 주변의 빛이나 카이의 감정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신기한 눈동자를 천진하게 즐기고 있었다.

산시로의 반응은 카이에게 있어 대단히 보기 드문 것이었다. 손이 닿을 만큼 가까이서 그의 민얼굴을 본 자 중에 바이저를 썼을 때와 완전히 똑같이 대한 인간은 지금껏 없었다.

지금까지 그에게 향한 시선은, 상대의 성별을 불문하고 카이가 시달려온 감겨드는 듯한 감정 그 자체였다. 그의 민얼굴을 처음 본 놀라움이 흥미로 변하고, 그게 습도가 높은 열의 혹은 차가운 잔혹함으로 변해가는 것을 카이는 지겹도록 경험했다.

엠파스라는 건 나름대로 불편해서, 상대가 표면상은 감추고 있는 마음이 아지랑이처럼 상대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게 보인다. 상대가 자제하는데도, 뻔히 보인 본심 때문에 아무리 해도 자신의 태도가 완고해져 버린다. 그런 카이의 태도를 통해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카이가 알았다는 걸 알면, 대개의 인간은 자제심을 내팽개치고 본심을 드러냈다.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오긴 했지만, 위험한 일을 겪은 건 한두 번이 아니고, 그는 고생을 모르는 도련님 같은 속 편한 입장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로는 산시로가 상상도 하지 못할 수라장을 경험해왔다고 할 수 있다.

카이의 과할 정도의 경계심과 인간불신, 극단적인 감정억제는 그가 지금껏 맛봐온 인간이 가진 그림자 부분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몸에 익힌 수단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산시로에게서는 카이가 경계하고 증오하기까지 하는 그림자 부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카이는 자신이 마치 푸르스름한 살충등처럼 인간의 마이너스 부분을 매혹해버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것을, 매혹당한 인간을 향한 용서 없는 공격과 같은 강도로 증오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성격에 독특한 음영을 더해서 한층 타인을 매혹한다는 아이러니한 결과가 되었다.

하지만 카이 주변에 있던 어떤 남자보다도 거칠고 야생동물의 체취를 가진 이 남자는 카이의 요염함에 홀리지 않을 만한 건강하고 강인한 정신을 가진 듯했다.

 

“무슨 생각해?”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자, 산시로가 들여다보고 있었다. 언제 몸을 일으켰는지 기계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보기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카이를 보고 있다.

 

“표정이 엄청 어두워. 어차피 이상한 생각이나 했겠지. 그만둬, 그만둬.”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겁니까?”

 

구제할 도리가 없는 곳까지 떨어질 뻔했던 사고에 제동이 걸린 카이는 감이 좋은 산시로에게 감사하면서 엷은 쓴웃음으로 그 그림 같은 입술을 끌어올렸다. 그에 대한 산시로의 답은 지극히 간단하다.

 

“텔레파스도 아닌데 알 리가 없잖아. 단지, 당신 눈 색이 변했으니까.”

 

모처럼 예쁜 만화경을 즐기고 있었는데 라는 것처럼 입술을 삐죽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머리 좋은 녀석들은 하여간 생각이 지나치니까. 내 식으로 말하자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에 스스로 자기를 칭칭 얽어매서 꼼짝도 못 하게 해버려.”

“그럴지도 몰라…….”

 

한숨처럼 읊조린 카이는 반짝임을 잃은 컬라이더스코프 아이를 감았다. 지금 자신의 얼굴을 산시로의 망설임 없는 눈에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럼 내가 뭘 느끼고 있는지 맞혀봐.”

 

그런 카이의 마음 따위는 완전히 무시하고, 산시로는 카이의 눈을 들여다본다. 자신의 말에 카이가 아직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은 사이에 카이의 손을 잡아서 자기 목덜미에 댔다.

 

“어때?”

 

카이가 타인에게 만져지는 것, 만지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걸 충분히 잘 알면서 산시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카이의 마음에 발을 들이는 짓을 했다. 하지만 그 태도에 악의가 전혀 없어서 카이는 화를 내려야 낼 수 없다.

루난의 특성으로 보통 사람보다 체온이 높은 카이의 손을 의외로 가는 목에 눌러 대고 천진하게 올려다보는 산시로에 카이는 큰 한숨을 쉬었다.

 

“또 뼈아픈 꼴을 당하고 싶은 겁니까?”

“농담도! 엠파스도 훈련하지 않으면 능력을 못 쓴다고 했잖아, 난 훈련대가 돼주겠다는 거라고.”

“그럼 산시로는 안 되겠네요. 제가 감정을 읽어내기 전에 생각하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나 버리니까요.”

“말하는 것 좀 봐.”

 

시원스레 말해버리는 카이에 산시로는 삐친 듯한 쓴웃음을 보낸 뒤 잡고 있던 카이의 손을 놓았다. 그 찰나에, 거의 다 풀렸던 가죽끈이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려 긴 머리카락이 시원한 소리를 내며 산시로의 얼굴에 드리운다.

 

“그렇게 방해되면 자르면 좋을 텐데.”

 

살짝 혀를 차며 성가신 듯이 머리카락을 쓸어올린 산시로에게 가죽끈을 건네주고, 지나치게 매끄러운 머리카락에 악전고투하는 산시로를 본다.

 

“소중히 여기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어째서 기르는 겁니까?”

“목덜미에 큰 흉터가 있거든. 다른 데라면 신경 쓰지 않겠지만, 뒤쪽에 흉터가 있으면 적에게 배후를 빼앗겼거나 등을 보이고 도망쳤다고들 생각할 것 같아서 꼴사납잖아.”

 

그렇게 말한 산시로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그러올려 보였다. 어둑한 곳에 노출된 목덜미를 들여다본 카이가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킨다. 평소에는 윤기 있는 흑발로 가려져 있는 목덜미에는, 귀 바로 아래부터 슈트에 감춰진 등까지 뻗은 찢긴 듯한 긴 흉터가 있었던 것이다.

 

“어릴 때 탔던 배가 반란군이랑 정규군의 전투에 휘말렸거든. 장소가 변경이라 제대로 된 치료를 못 해서 흉터가 남아버렸어. 뭐, 목숨이 붙어있는 것만 해도 다행인가.”

 

가벼운 어조로 그렇게 말한 산시로는 카이에게 받은 가죽끈을 입에 물고 머리카락을 묶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는 산시로의 어투와는 모순되게, 이것 때문에 그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맸으리라는 걸 알 수 있는 깊은 상처에 놀란 카이를 보고, 머리카락을 다 묶은 산시로가 재미있는 듯이 눈썹을 올린다.

 

“이런 흉터 정도로 놀라지 말래도. 용병이 된 뒤에 생긴 상처가 훨씬 심했으니까. 그쪽은 의사가 말끔하게 고쳐줬지만, 그게 전부 흉터로 남았으면 내 몸은 꿰맨 곳투성이일 거야.”

 

산시로의 가벼운 말투가 도리어 그가 경험해온 위험을 상상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그의 옆에서 태평한 얼굴로 웃음을 보이는 산시로라는 젊은 청년이, 카이와 지금까지 인연이 없었던 세계의 인간이라는 걸 재확인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용병이란 건 위험한 직종이네요.”

“그렇지 뭐. 그러고 보니 요전에 일할 때 자기폭풍에 딱 걸려서 어깨부터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는데, 완전히 치료하지 않은 상태로 이 배에 타버렸더니 어깨가 빠지기 쉬워졌어. 탈구는 꽤 아프다고. 눈에서 불꽃이 튀어. 주의하지 않으면 또 빠질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고 어깨를 빙글 돌린 산시로의 옆모습을 카이는 새삼스럽게 다시 보았다.

립 밴 윙클 효과 탓에 그와 거의 같거나 약간 연하로도 보이는 산시로가 경험을 쌓은 프로 용병이라는 걸 인제 와서 의심할 생각은 없다. 방약무인한 태도도 박력 있는 감정표현도, 소문으로 듣던 용병이라는 직종의 인간다운 태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관으로서의 우수함이나 때때로 보이는 적확하고 냉정한 판단력. 무심한 듯이 입에 올리는 날카로운 통찰은, 난폭하고 성급한 야생아라는 평가만으로는 다 수습되지 않는 포용력을 느끼게 하는 것도 확실하다.

 

“――!”

 

생각하는 데에 몰두했던 카이는 갑자기 어깨에 기대온 따뜻한 몸에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랐다. 산시로다. 자꾸 기지개를 켜거나 하품을 한다 싶었지만, 결국 잠들어버린 듯하다.

 

“움직이지 마, 기분 좋으니까…….”

 

황급히 산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려고 몸을 살짝 움직인 카이에게 웅얼대는 목소리가 돌아온다.

꽤나 제멋대로 말하고 부스럭부스럭 편한 위치를 찾던 산시로는 호리호리한 카이의 목덜미에 콧등을 묻은 뒤 만족스러운 듯이 한숨을 쉬고는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카이가 들여다보니, 무방비하게 그에게 몸을 맡긴 산시로는 믿기지 않게도 푹 자고 있다.

목덜미에 닿는 폐활량 있는 깊은 숨결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움츠리려다 몸을 굳히고 그걸 참는다. 완전히 안심하고 그에게 몸을 기댄 산시로의 체중이 결코 불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이에게 있어 이런 식의 신체 접촉은 지금껏 없었던 일이다. 엠파스이자 루난이다 보니 오히려 이런 별 뜻 없는 신체 접촉이라는 게 없었다.

루난에게 몸의 접촉은 단적으로 말해서 서로 껴안는 걸 의미했지만, 루난으로서의 생활방식을 부정하고 타인과의 접촉을 병적일 정도로 기피한 카이에게는 자기가 먼저 타인을 만지려는 마음도 없었고, 그걸 아는 그 주변의 인간은 지금의 로드나 산드라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예의 바르지만 냉담한 태도로 그를 접했다.

그런데도 손대려 하는 인간에게는 폭력적이고 습도가 높은 열광적인 의지가 있었다.

내맡겨진 따스한 몸에 당황하면서, 눈을 감고 숨을 멈춘 뒤 어깨에 기댄 산시로에게서 배어 나오는 감정을 살펴본다.

아니나 다를까, 산시로는 순수하게 자는 것을 즐기고 있고, 푹 기댄 카이의 몸에 바라는 것은 받쳐줄 어깨와 자기보다 약간 높은 카이의 체온이다.

음습한 구석이 전혀 없는 건강하고 당연한 산시로의 감정은 카이의 긴장된 의식에서도 힘을 뺐다.

아무리 해도 긴장돼버리는 어깨에서 애써 힘을 빼고 맡겨진 몸을 받치기 쉽도록 고쳐 앉는다. 그러자 산시로가 미묘하게 움직여서 그의 어깨에 한층 깊게 얼굴을 묻었다.

얼굴로 매끄럽게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준 뒤 그 곱슬기 없는 흑발의 기분 좋은 감촉에 눈을 가늘게 뜬다. 처음 만진 산시로의 머리카락은 털결이 좋은 야생동물을 연상시켜서, 더 만져보고 싶다고 문득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햇볕에 탄 윤곽이 뚜렷한 용모. 완전히 안심한 깊은 숨결.

눈을 감은 모습을 보니 산시로의 이목구비가 의외로 반듯하다는 걸 카이는 처음으로 알아챘다. 거친 동작이나 난폭한 말투가 아니면 그는 의외로 봐줄 만한 남자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뒤, 그런 걸 생각하는 자신에 쓴웃음을 짓는다.

 

“무거워.”

 

속삭인 말에 돌아오는 건 깊은 숨결뿐.

눈을 뜰 것 같지 않은 산시로에게 맞춰주려고, 뻗고 있던 등줄기에서 힘을 뺀다. 아주 약간 망설인 뒤 서로 떠받치듯이 산시로의 몸에 기댔다.

진심으로 자는 걸 즐기는 산시로의 잠든 얼굴에 이끌려 카이도 컬라이더스코프 아이를 감는다.

규칙적인 호흡 소리를 들으며, 카이는 인상이 불안정한 이 남자에게 자신이 흥미를 갖기 시작한 것을 어렴풋이 의식하고 있었다.

 

 

 

 

→청의 궤적 上 - 6. 드레이크 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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